- 연역 : 孝宗 6년(1655)에 16세손 申鋏(신협 1605~1691) 孝行을 旌閭키 위해 創建하였으며, 肅宗29년(1703)에 15세손 申之益(1588~1649)16세손 申鐔(신심1611~1647)父子의 효행도 함께 기리기 위해 合設한 旌閭閣이며 英祖 28년(1752)增修하고 1972년 補修하였음.
이 삼효각은 조선 효종 6년(1655)에 세운 효자 신협(申鋏,1605~1691)의 효자각에 숙종 9년(1683)에세운 효자 양일당(養一堂) 신지익(申之益, 1596~1640)과 그의 아들 효자 신첨심(申첨, 1611~1647) 부자의 효자각을 숙종 29년(1703)에 합설한 아주 신씨(鵝洲申氏) 세효자의 정려이다. 지금의삼효각은 영조 28년(1752)에 중건하고1972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2간,측면 1간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사면은 홍살로 막고 안에 세 효자의 정문 편액을 걸었다.
그리고 숙종 12년(1686)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가 쓴 "아주신씨선세사실(鵝洲申氏先世事實)"과 숙종 29년(1703)에장암(丈巖) 정호(鄭澔)가 지은 "삼효사실기(三孝事實記)"그리고 영조 38년(1762)에 송가상(宋可相)이 지은 "삼효려중수기(三孝閭重修記)"가 걸려 있다. 밖에는 "삼효려(三孝閭)"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현재 주위에는 담장을 쌓고 앞에 철문을 달았다 - 旌閭 內容 ∙孝子 朝散大夫 行永崇殿 參奉 申之益之門 ∙孝子 學生 申鋏 之門 ∙孝子 學生 申鐔 之門 三孝子중 之益, 鐔 父子의 旌閭 內容은 肅宗 12년(1686)에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짓고 쓴 것이며, 之益의 손자 응태(應泰 1643~1728)는우암(尤庵)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나 일찍이 향시(鄕試)에는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과거(科擧)에는 끝내 오르지 못하고, 그뒤 뜻을 달리하여 학문연구에 전심, 역학(易學)과 성리학(性理學)에 깊이들어갔으며 천문․역수에도 밝았다. 1689년(숙종 15) 송시열이 賜死되자 이에 항변(抗辯)하는 내용의 上疏文을 써서 대궐 앞에 나아가 시위하는 등, 스승의 신원을 위하여 힘썼으며, 만년에는 후진양성에 힘써 문하에많은 학자가 배출되었고. <사서제요>와 <천명태주도> 등의 저서를 남겼다.
이 삼효각은 조선 효종6년(1655)에 세운 효자 신협(1605-1691)의 효자각과 숙종9년(1683)에 세운 효자 양일당 신지익(1596-1640)과 그의 아들인 효자 신심(1611-1647)부자의효자각을 숙종 29년(1703)에 합설한 아주신씨 세 효자의정려이다.
삼효려 옆으로는 2001년 11월4일에 개축당시 성금을 낸 사람들의 이름과 성금내역이 적힌 돌비가서있다.
신지익은 대신들이 효로써 천거하니 특별히 조산대부행영숭전참봉(朝散大夫行永崇殿參奉)에 제수 받았으며 검암서원(儉岩書院)에 배향되었다.
편액밑에는 숙종12년(1686)에 우암 송시열이 짓고 수암 권상하가 쓴 아주신씨선세사실(鵝州申氏先世事實)이 걸려있다
신협은 일찍 아바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섬기는데 정성을 다하여 주위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였다 어머니가 병에 걸려 위중하게 되자 손가락을 입으로 물어서 손가락에 피를 내어 어머니 입속에 피를 흘려넣어 소생케하고(斷指注血) 또한 한겨울에도 어머니가 고사리가 먹고 싶다고 하자 고사리등을꺽어 봉양하고 또 앵두도 따고 잉어도 잡아 봉양하였다.또한 어머니가 꿩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자 매가꿩을 잡아 집안으로 떨어트려주는 등 하늘이 그의 효심에 감동하였다.
지금도 그 당시 신협이 고사리를 꺽었다던 곳이 미원면 가양리 솔골에고사리골 앵두밭 잉어바위등이 있으니 이 때부터 전해져 내려온것이라 전한다.
이러한 소식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를 명하니 공이 생존하여 계실때라부끄러워하며 정려를 못하게 하였으나 왕명이라 하여 거역할 수 없으니 정려를 짓고 산동 일면의 세금으로공의 생활비를 충당하게 하였다고 한다.이러한 사실은 1990년에발간된 청원군지와 1995년에 발간한청주향교지등에등재되어있다.